팔달산(八達山)
팔달산은 수원시의 중심에 위치한 해발 143m의 비교적 낮은 산이다. 수원부읍
지(水原府邑誌) 를 보면, “수원부의 주산(主山)이며, 고적이 많이 있다.”고 되
어있다. 실제로 화성 성곽의 약 절반 정도가 팔달산의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으
며, 서장대를 위시해서 서노대, 서포루, 화양루 등 전망 좋은 누대가 있고, 그
중간 중간에 서암문, 서남암문이 숨겨져 있다. 팔달산에 있는 서노대에서는 한
수 이남 경기도의 동서남북을 전망할 수 있고, 발 아래로는 수원 시내가 한눈
에 보인다.
팔달산은 서장대, 화양루 등의 문화재 뿐만 아니라, 강감찬 장군 동상, 홍난
파 노래비, 3·1 운동 기념비 등의 다양한 기념물과 약수터가 있어 수원 시민은
물론 다른 지방 사람들이 많이 탐방하는 곳이다. 해발 70~99m 부근에 순환 도로
가 있으며, 도로 아래쪽은 주거 지역이다. 한국 전쟁을 전후로 하여 팔달산 산림
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1960년대 초부터 다시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현재
에 이르고 있다.
풍수 지리학적으로 보면, 수원의 혈처(穴處)에 해당되는 곳이 바로 팔달산이
라 한다. 지관들에 의하면, 수원의 중심이자 혈이 되고 명당이 되는 곳이라는 것
이다. 지관 이한곤에 의하면, 팔달산중턱 강감찬 장군 동상 뒤쪽에서 테니스장
이 있는 사이에 음택(陰宅)의 명당이 있다고도 한다. 이 명당은 지기(地氣)가 너
무 강해서 소나무 잎도 다른 지역의 것보다 강하고 윤이 난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팔달산이 배모양을 하고 있어 배에 짐이 실리면 가라 앉듯이, 수
원에서 부를 누리게 되면 반드시 망하여 떠나게 되며,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다
시 부를 축적한다고 한다. 수성 차씨(隋城車氏)가 그 한 예라고 한다. 혹은 팔달
산은 배를 엎어 놓은 형국이라서, 수원에서 부자가 되면 모두 서울로 가는데, 이
는 배를 타고 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팔달산은 정기가 세어서 집을
지으면 망한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이 곳은 배의 형국이기
때문에 배가 뒤집어지지 말라고 집을 많이 지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팔달산은 예전에는 ‘탑산(塔山)’이라 불리었다. 이는 어느 산과도 맥이 통하
지 않은 독립적인 산으로 평지에 탑을 세워 놓은 것과 같다 하여 붙여진 것이었
다. 그리고 멀리서 보면 그 모양이 나르는 용과 같다고도 말하여 왔다.
이렇게 탑산이라 불리던 것이 팔달산으로 바뀌게 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 문
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에서부터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까지
지낸 이고(李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고는 공양왕 때에 자진 은퇴하여 수원
의 광교산 남쪽에 있는 이 산 밑에 살며 호를 망천(忘川)이라 짓고 살았다. 학사
정(學士井)이 있었던 지금의 남창동 팔달산 자락에서부터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연못에서 고기를 낚고, 광교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망천에 나가, 송산 조윤
(松山 趙胤), 둔촌 이집(遁村 李集) 등 팔학사와 벗하여 세상을 잊고 소요하며
세월을 보냈다.
이때 공양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근일에는 무엇으로 소일하고 있느냐’를
물으니,‘집 뒤에 있는 탑산의 경치가 무한히 아름답고, 산정에 오르면 사통팔달
(四通八達)하여 마음과 눈을 가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 즐겁다.’고 대답하였다
고 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이고의 경륜과 어진 심성을 알고 경기우도접겸사
(京畿右道接兼使)에 임명하고, 조정에 나올 것을 누차 권고했으나 끝내 나서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화공을 시켜 이고가 살고 있는 탑산을 그려오라 하였
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고는‘역시 아름다운 산’이라 크게 감탄하고 산 이름을
‘팔달산’이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예로부터 팔달산의 경관은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서, 수원 팔경 중의 하나로
‘팔달청람(八達晴嵐)’이 꼽힌다. 즉, 팔달산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광경
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저녁 무렵의 풍광도 아름다워서‘ 팔달모운(八達暮
雲)’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